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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늘 부족하게 만드는 '가짜 저울'

그 결핍은 당신 것이 아니다, 세상이 만든 저울이 헛돌 뿐이다

이상한 저녁이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무언가를 했고, 게으르지도 않았다. 열심히 일했다. 회의에 들어갔고, 퇴근 시간도 허투로 쓰지 않으려고 휴대폰으로 세상 소식을 따라잡았다. 그런데 불을 끄고 누우면 이상했다. 오늘 뭘 했는지 크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 오늘 뭐 했지? 분명 열여섯 시간을 깨어 열심히 무엇인가 했는데,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서너 조각뿐이었다. 하루를 통째로 도둑맞은 기분. 누구나 이런 저녁을 안다. 그리고 그런 저녁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대부분이라는 게 진짜 문제다.

시간이 없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정말 시간이 없는 걸까. 밤을 밝히는 전기 덕에 깨어 있는 시간은 어느 시대보다 길다. 이동은 빨라졌고, 집안일의 수고는 상당 부분 기계가 대신 치러준다. 물리적 시간은 어느 시대보다 많이 주어졌는데, 체감하는 시간은 어느 시대보다 가난하다. 그렇다면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시간을 잃고 있는 거다. 어디서 새는지 모르는 채로.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자신의 하루를 평가하는 기준부터 살펴봐야 한다. 남보다 얼마나 앞섰는지, 얼마나 많은 성과를 냈는지가 하루의 가치를 정하는 기준이 되면, 실제로 겪은 일보다 점수가 먼저 떠오른다. 그 평가가 삶의 경험을 어떻게 바꾸는지 살펴보자.

척도의 폭력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계측당한다. 세상에 나온 지 몇 분 만에 몸무게와 키가 적히고, 그 숫자가 정상 범위 안인지부터 확인된다. 존재를 시작하는 첫 순간이 곧 측정당하는 순간이다. 그 뒤로 평생, 우리는 저울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평가사회는 모든 것에 저울을 들이민다. 문제는 그 저울이 수치로 잴 수 없는 것에까지 들어온다는 거다. 사랑, 의미, 집안 볕 한 조각, 사람. 이런 건 크기가 없는데도 사회는 기어이 등수를 매긴다. 그리고 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너는 더 되어야 한다는 당위까지 심는다. 잰다는 건 늘 비교한다는 것이고, 비교가 시작되는 순간 모든 것은 모자란 것이 된다.

저울이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는 말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사람에게 물건의 말을 붙인다. 스펙. 원래 살상 무기나 기계 사양을 가리키던 말이다. 그 차가운 말을 이제 사람의 능력에 붙인다. 몸값. 값은 원래 팔리는 물건에 매기는 것이다. 그 말을 이제 사람의 연봉에 붙인다. 등급, 서열, 랭킹. 어느 것 하나 사람의 말이 아니다. 취업 시장에서 사람을 스펙으로 줄 세우고, 대학을 서열로 늘어놓고, 사는 동네와 타는 차로 사람의 급을 매기는 일이 우리에겐 너무 익숙하다. 물건의 말로 사람을 부르는 데 아무도 놀라지 않게 됐다는 것, 그게 평가 사회의 현실이다.

그리고 저울에는 교묘한 착시가 하나 있다. 잴 수 있는 것만 중요해 보인다는 것. 연봉은 숫자가 되니까 또렷하고, 볕의 단맛은 숫자가 안 되니까 흐릿하다. 그래서 우리는 또렷한 것을 향해 달린다. 중요해서 재는 게 아니라, 재지니까 중요해지는 거다. 순서가 뒤집힌 것이다. 정작 삶에서 무게가 나가는 것들, 사랑과 의미와 고요 같은 것은 저울에 안 올라간다는 이유로 장부에서 빠진다. 재지 못하는 것이 사라진 장부. 우리가 하루를 결산하는 장부가 딱 그 모양이다. 그러니 하루가 텅 비어 보이는 건 하루가 비었기 때문이 아니다. 진짜 채워진 것들이 장부에 안 적히기 때문이다.

저울은 눈에 잘 안 보인다. 몸에 밴 지 오래라서 그렇다. 학교는 열두 해 동안 등수를 매기고, 회사는 연봉과 직급으로 그 일을 이어받는다. 은퇴하면 끝나는가 하면, 이제 자식의 등수가 내 등수가 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저울에서 내려올 기회는 한 번도 주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쉼에도 저울이 들어온다. 남들만큼 근사한 곳에서 쉬었는지, 그 쉼을 남 보기 좋게 증명했는지. 여행을 가서도 우리는 풍경을 보기 전에 먼저 사진을 찍어 올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지로 그 쉼의 값을 매긴다. 좋아요가 적으면 좋았던 하루도 어쩐지 초라해진다. 쉬는 동안에도 우리는 채점당한다. 쉼이 쉼이 아니게 되는 이유다.

오래된 생존장치의 오작동

그럼 이 저울은 왜 이렇게 힘이 셀까. 그건 아주 오래된 본능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수십만 년을 무리 지어 살았다. 그 시절 무리에서 밀려나는 건 곧 죽음이었다. 사냥도 채집도 아이 키우기도 혼자서는 안 됐다. 그래서 우리 안엔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살피는 예민한 장치가 새겨졌다. 수치심과 불안. 이건 원래 나를 살리던 생존을 위한 감각이다.

그 장치가 얼마나 정교한지 보자. 낯선 자리에서 말실수를 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몸이 먼저 반응한다. 무리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곧 생사를 갈랐던 시절을 떠올려 보자. 함께 잡은 고기를 혼자 축내다 들킨 사람, 나눠야 할 것을 나누지 않은 사람은 무리의 눈총 앞에서 얼굴이 달아오르고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었다. 그 붉어짐과 수그림은 내가 규칙을 알고 있으며 벗어날 뜻이 없다는 신호였다. 수치심은 나를 무리에 붙들어두던 접착제였고, 불안은 밀려나기 전에 자세를 고치게 하던 경보였다. 둘 다 고마운 장치였다. 다만 타고나는 것은 남의 눈을 살피는 예민함이지, 무엇을 부끄러워할지가 아니다. 갓난아이는 발가벗겨져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무엇이 흉이고 무엇이 자랑인지는 무리 안에서 자라며 배운다. 예민함이라는 그릇은 타고나되, 거기에 무엇을 담을지는 사회가 새겨 넣는 것이다.

이 장치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나쁜 소식에 훨씬 민감하다는 것. 칭찬 열 마디는 흘려도 뼈아픈 말 한마디는 몇 날을 간다. 이상할 게 없다. 좋은 소식을 놓치면 기회를 잃는 정도지만, 나쁜 신호를 놓치면 목숨을 잃던 시절의 설계니까. 문제는 평가사회가 이 민감성을 정확히 과녁으로 삼는다는 거다. 평가사회의 작동 방식은 단순하다. 끊임없이 순위를 매겨, 대다수에게 너는 모자라다는 신호를 쉬지 않고 보내는 것이다. 1등이 하나면 나머지 전원에게는 모자란다는 통지서가 간다. 시험 점수로, 대학 이름으로, 입사한 회사로, 연봉과 아파트 평수로, 사회는 매 순간 나를 어딘가에 세워 위아래를 알려준다. 뼈에 새겨진 경보 장치에 대고 하루 종일 사이렌을 울리는 것, 그게 평가사회가 우리를 다루는 방식이다.

문제는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거다. 이제 소속은 숫자로 매개된다. 연봉, 팔로워, 등수. 살리려던 장치가 엉뚱한 저울에 붙들려 헛돈다. 그러니 내 결핍은 고장난 마음이 아니다. 엉뚱한 시대에 놓인 생존장치가 오작동하고 있는 거다.

오작동의 장면들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수시로 또래 연봉을 검색해 보는 것. 오랜만의 동창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이 이상하게 허한 것. 나보다 어린 사람의 성취 기사를 읽고 하루가 가라앉는 것. 몸은 사자를 만난 것처럼 반응하는데, 눈앞에 사자는 없다. 화면 속 숫자가 있을 뿐이다. 그 숫자는 나를 물어뜯지 못한다. 그런데 내 몸은 물어뜯긴 것처럼 아프다.

옛날의 무리는 그래도 끝이 있었다. 부족은 커야 백 명 남짓이었고, 그 안에서 내 자리는 어딘가에는 있었다. 사냥을 못해도 이야기를 잘하면 됐고, 힘이 없어도 약초를 알면 됐다. 지금 우리가 비교당하는 무리는 끝이 없다. 전 세계가 한 무리가 됐고, 어느 분야든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화면 속에 상시 진열된다. 게다가 그 저울은 손안에서 잠들지 않는다. 자려고 누워 마지막으로 켠 스마트폰에서도, 남들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 끝없이 흘러 내 하루의 끝을 채점한다. 백 명 중의 내 자리는 찾을 수 있어도, 팔십억 명 중의 내 자리는 영영 안 보인다. 장치는 그대로인데 무리만 무한대가 되고, 그 무한한 무리가 밤낮없이 주머니 속에서 나를 따라다닌다. 오작동이 멈출 수 없는 이유다.

강하게, 그러나 짧게 타는 불

이 결핍이 만드는 동기는 세다. 시기, 우월감, 열등감, 열패감. 순간적으로는 사람을 무섭게 밀어붙인다. 그런데 딱 짚불 같다. 마른 짚에 불이 붙으면 화르르 크게 타오른다. 그러나 그 불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어 재만 남긴다. 자극이 사라지면 동력도 꺼지고, 비교 대상이 바뀌면 매번 새 짚을 밀어 넣어야 겨우 다시 탄다.

게다가 쓸수록 몸이 상한다. 마치 초가공 인스턴트 식품 같다. 혀엔 강렬하지만 먹을수록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 뇌도 똑같다. 더 센 자극을 좇을수록 그만큼 큰 통증이 따라온다. 인정과 우월감 뒤에 불안과 공허가 붙어 온다.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라 뇌가 설계된 방식이다. 뇌에서 쾌락과 통증은 하나의 시소처럼 맞물려, 한쪽이 쾌락으로 크게 기울면 반대편이 같은 무게의 통증으로 되민다.1 그래서 강렬한 쾌감일수록 뒤따르는 반동도 크다. 결핍의 불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건 그래서다.

겪어본 사람은 안다. 시험에서 남을 이겼을 때의 쾌감이 얼마나 갔는지. 승진 발표가 나던 날의 들뜸이 몇 주나 버텼는지. 이상하게도 그 기쁨은 도착하는 순간부터 새어나가기 시작한다. 게다가 저울의 눈금은 가만있지 않는다. 어제는 저 사람이 기준이었는데 오늘은 더 높은 사람이 기준이 되고, 내가 그 자리에 오르면 눈금이 다시 위로 옮겨간다. 위를 보면 더 높은 사람이 있고, 아래를 보면 쫓아오는 사람이 있다. 이긴 자리는 쉴 자리가 아니라 지킬 자리가 된다. 그래서 결핍의 불로 달리는 사람은 이겨도 목이 마르다. 이기는 순간, 저울이 새 눈금을 내밀기 때문이다.

짚불에는 더 조용한 문제가 하나 있다. 방향이 밖에서 정해진다는 것. 결핍은 남을 이기라고 소리치고, 이 노이즈에 순수한 자아실현의 목소리는 파묻힌다. 그래서 결핍으로 달리는 사람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남들이 달리는 곳으로 달리게 된다. 남이 그어 놓은 결승선을 향해 전력으로 뛰는 것이다. 무섭게 성실했는데 도착해 보니 낯선 곳인 삶. 원하는 걸 이뤘는데 이게 내가 원하던 게 맞나 싶은 순간. 그건 게을러서 생긴 일이 아니다. 불은 강렬했는데, 방향이 내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밖에서 정해준 방향으로만 달리는 삶은, 아무리 부지런해도 실은 남에게 끌려다니는 삶이다.

네 개의 모조품

더 지독한 건, 평가사회가 이 가짜를 진짜인 척 판다는 점이다. 진짜 자유 대신 우월감을, 진짜 주체성 대신 남을 움직이는 통제감을, 진짜 창조 대신 전시용 결과물을, 진짜 자아 확장 대신 단순 축적을 판다. 다 진짜의 모조품이다. 겉은 비슷한데 방향이 정반대다. 하나는 존재에서 흘러나오고, 하나는 존재를 팔아서 산다.

이 모든 것의 뿌리에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 있다. 쪽팔리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삶이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에게 뒤처져 보이는 수치를 면하려고 달리는 삶. 이 회피의 삶은 늘 남의 눈을 기준으로 삼기에,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물을 겨를이 없다. 그리고 이 삶이 바로 앞서 말한 왜곡을 낳는다. 잴 수 없는 것을 기어이 재려 드는 그 인위적인 몸부림이, 수치를 면하려는 이 회피의 삶에서 나온다. 모조품 장사의 수법은 늘 같다. 진짜와 닮은 겉을 만들고, 진짜보다 빨리 손에 쥐여준다. 하나씩 뜯어보면 보인다.

우월감은 자유가 아니다

위에 서면 자유로워 보인다. 아쉬운 소리를 안 해도 되고, 눈치 볼 사람이 줄어드니까. 그래서 우리는 자유가 갖고 싶을 때 우월을 산다. 좋은 차의 하차감을 사고, 내밀 만한 명함을 사고, 무시당하지 않을 동네를 산다.

그런데 우월감은 비교 위에 지은 집이다. 아래가 있어야만 위가 있다. 내 자유가 남의 위치에 달려 있다면 그건 이미 자유가 아니다. 비교 상대가 바뀌는 순간 무너지고, 무너질까 봐 지켜야 하는 자유는 그 자체로 감옥이다. 좋은 차를 산 기쁨은 더 좋은 차가 옆에 서는 순간까지만 간다. 진짜 자유는 반대로 비교가 꺼진 자리에서 온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내 가치에 무게를 두고 가는 것. 그건 아무도 뺏을 수 없어서 지킬 필요조차 없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반대말이 아니라 한 몸이다. 둘 다 같은 저울 위에 서서, 눈금의 위쪽을 보느냐 아래쪽을 보느냐가 다를 뿐이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죄다 시기나 열등감 탓으로 돌리는 사람일수록, 위에 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실은 열등감에 허우적거릴 확률이 높다.

통제감은 주체성이 아니다

남을 움직일 수 있으면 내 삶의 주인이 된 것 같다. 직급이 주는 힘, 돈이 시키는 힘, 목소리 한 번에 좌중이 조용해지는 힘.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뜻대로 움직여지는 사람이 많을수록 내가 단단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방향을 보면 정반대다. 통제감은 힘이 밖으로 뻗어야만 확인되는 감각이라, 움직여줄 남이 없으면 텅 빈다. 직급이 사라진 은퇴 첫날, 명령이 닿던 거리만큼의 공허가 온다. 주체성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비롯한다. 내 물음에 내가 답하고, 내 걸음의 이유를 내가 갖고 있는 것. 남을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비롯하는 사람이 주체다. 앞의 것은 남이 필요하고, 뒤의 것은 남이 없어도 바로 선다.

과시는 창조가 아니다

보여주기 위한 결과물은 창조를 닮았다. 무언가 만들어지긴 하니까. 사진을 위해 떠나는 여행,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위해 굽는 빵, 전시용 취미. 부지런히 만들고는 있는데, 어딘가 허기가 남는다.

만든 것의 주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과시용 결과물은 남의 눈 속에 산다. 반응이 없으면 만든 의미가 사라진다. 창조는 만드는 동안 이미 산다. 풀리지 않던 것이 풀리는 순간의 쾌감, 흩어져 있던 것이 하나로 맞물리는 순간의 환함. 박수는 오면 좋고 안 와도 그만이다. 박수를 위해 만드는 사람은 박수가 끝나면 빈손이고, 만들며 살아 있던 사람은 박수와 무관하게 이미 받았다.

축적은 자아 확장이 아니다

쌓는 것은 커지는 것과 혼동되기 쉽다. 재산이 늘고 스펙이 붙고 이력 한 줄이 더해지면 내가 커진 것 같다. 수집은 끝이 없다. 자격증 다음에 자격증, 아파트 다음에 아파트.

그런데 쌓인 것은 내 옆에 있지, 내 안에 있지 않다. 잔고가 늘어도 나는 그대로다. 곳간이 열 배가 되어도 곳간 주인의 마음의 키는 한 뼘도 안 자란다. 자아가 정말 커지는 길은 소유와 쌓임이 아니라 확장과 흘러감이다. 내 안에서 익은 것이 말과 행동이 되어 남에게 건너가고, 그 사람 안에서 다시 익는 것. 그때 나는 내 몸의 크기를 넘어서 존재하게 된다. 곳간이 커지는 것과 내가 커지는 것은 다른 일이다.

네 모조품의 공통점이 보일 것이다. 전부 자신이 주체가 아니다. 우월은 아래를 볼 남이, 통제는 움직여줄 남이, 과시는 봐줄 남이, 축적은 부러워할 남이 필요하다. 진짜 넷은 전부 남의 시선에 기대어 서지 않는다. 자유도 주체성도 창조도, 홀로 있는 방에서 이미 온전하다. 자아 확장은 혼자만 누리는 걸 넘어 남에게 흘러간다. 가짜는 남의 시선을 먹고, 진짜는 존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저울은 사랑도 잰다

저울의 가장 슬픈 침범은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다.

물론 사람 사이에도 잴 수 있는 것은 있다. 사랑을 돈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얼마나 자주 연락하고 무엇을 챙겼는지로 마음의 크기를 어림하기도 한다. 관계에도 분명 측정되는 표면이 있다. 그런데 그 표면 아래, 정작 사랑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저울 밖의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명시적으로 사랑의 이유를 정하고 만나지 않는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을 경험하며, 그 사람이라서 좋은 것이다. 문제는 저울이 몸에 배면, 잴 수 있는 표면이 잴 수 없는 핵심을 덮어버린다는 데 있다. 내 연인이 남의 연인보다 나은가, 내 아이가 옆집 아이보다 앞서는가, 내 가족이 남 보기에 그럴듯한가. 함께 있는 사람이 기쁨의 대상이 아니라 비교의 항목이 되는 순간, 사랑은 조용히 식는다.

부모의 사랑이 특히 그렇다. 아기는 잘 먹기만 해도 환호를 받는다. 그저 존재해서 감사한 시기가 있다. 하지만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또래와 견주기 시작하면, 사랑이 평가로 바뀐다. 아이는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심사받는다고 느낀다. 그 저울은 부모도 모르는 새 대물림된다. 어릴 때 재여 자란 아이가 커서 자기 아이를 재는 것이다. 그렇게 저울은 세대를 건너 흐른다.

친구 사이도 저울이 끼면 피로해진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가 안부가 아니라 근황의 비교가 될 때다. 누구는 어느 회사로 옮겼고, 누구는 어디에 집을 샀고, 누구네는 어디로 여행을 다녀왔다더라. 반가움으로 시작한 자리가 어느새 성적표를 맞대는 자리가 된다. 요즘은 이 비교가 굳이 만나지 않아도 온종일 이어진다. 남들의 결혼과 승진과 여행과 성공이 화면 속에 쉼 없이 전시되고, 그럴듯하게 포장된 그 삶들 옆에서 내 하루는 자꾸 초라해진다. 분명 반가웠는데 왜 지쳤을까. 저울이 그 자리에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만난 게 아니라 그와 나를 견준 것이다. 저울은 이렇게 만남까지 훔쳐 간다. 함께 있었으되 함께 있지 못한 자리로 만든다.

저울이 훔치는 것은 시간이다

여기까지가 저울의 수법이다. 그런데 처음의 물음이 남아 있다. 저울은 왜 시간 도둑인가.

비교하는 마음은 현재를 수단으로 만든다. 지금 이 순간은 다음 눈금으로 가는 발판일 뿐이라 머무를 이유가 없다. 볕이 좋아도 그냥 지나친다. 지금 누리는 건 한가한 사람들 얘기고, 나는 아직 모자라니까. 그렇게 현재가 통째로 다음을 위해 저당 잡힌다.

저울의 시간은 늘 미래시제다. 합격하면 살겠다, 승진하면 살겠다, 집을 사면, 은퇴하면. 삶을 자꾸 다음으로 미루는 이 연기(延期)에는 끝이 없다. 도착할 때마다 저울이 새 눈금을 내민다는 걸 이미 봤으니까. 온 나라가 무언가의 지망생으로 사는 것도 그래서다. 대학 지망생, 취업 지망생, 승진 지망생. 늘 무언가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대기실에 살 뿐, 정작 지금을 사는 사람이 드물다. 그렇게 수십 년을 미루다 보면 이상한 계산서가 나온다. 준비하며 산 시간은 수십 년인데, 정작 살았다고 할 시간이 얼마 없는 것이다.

저울은 지나간 시간마저 훔친다. 밤에 누우면 낮의 장면이 아니라 낮의 점수가 재생된다. 그 말을 왜 했을까,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봤을까,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하루를 곱씹는 게 아니라 하루의 성적표를 곱씹는다. 후회가 다음 날의 후회를 부르고, 그 후회가 또 다음 날로 이어져, 낮이 밤을 좀먹고 밤이 다시 낮을 좀먹는 고리가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다. 이런 후회와 수치의 기억은 이상하게도 오래 남는다. 아프기 때문에 더 또렷이 새겨진다. 하지만 오래 기억된다는 것만으로 삶이 풍부해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기억이라도 어떤 기억은 나를 살찌우고 어떤 기억은 나를 깎아먹는다. 경험을 음미한 기억은 돌아볼수록 그 순간의 느낌과 의미가 분명해져 나를 넉넉하게 하지만, 저울의 기억은 돌아볼수록 나를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이 남아 있는 시간만이 아니라, 다시 떠올릴 때 지금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이다.

열여섯 시간을 깨어 있었는데 손에 남는 게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시간이 부족했던 게 아니다. 저울 위에서 보낸 시간은 애초에 내 것으로 저장되지 않는다. 미래로 저당 잡힌 현재와, 점수로 곱씹는 과거 사이에서, 하루는 살아지지 않은 채 지나간다.

인공이라서, 벗을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인공인 것은 결핍 자체가 아니다. 결핍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고,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도 하다. 인공인 것은 이 결핍을 만성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원인이다.

우리 몸을 보면 이 구분이 쉽게 잡힌다. 상처가 나거나 균이 들면 그 자리가 붓고 열이 나고 아프다. 아프지만 이건 몸이 나를 지키는 일이다. 침입자를 물리치고 상처를 아물리려 염증이 생긴다. 그래서 원인이 사라지면 이 염증은 제 할 일을 마치고 스스로 꺼진다. 짧게 앓고 낫는 이 염증을 신경과 전문의 이승훈 교수의 『착한 염증 나쁜 염증』에서는 착한 염증이라 부른다. 반대로, 물리칠 적도 아물릴 상처도 없는데 염증이 만성적으로 지속되면 그것은 나를 지키는 대신 나를 태운다. 제 몸을 서서히 좀먹는 이 꺼지지 않는 불을 나쁜 염증이라 부른다. 만성 염증은 아프지 않게 조용히 오래 타기에, 급성보다 더 깊이 몸을 무너뜨린다.2

결핍도 이 둘로 갈린다. 몸의 염증이 통증으로 드러나듯, 마음의 결핍도 통증으로 온다. 생존을 위한 결핍은 착한 통증이다. 실재하는 허기와 위험에 켜졌다가 채우면 꺼졌다. 배를 채우면 허기가 가시듯. 괴로웠지만 나를 살리는 통증이었다. 오늘 우리를 갉는 결핍은 나쁜 통증이다. 물어뜯을 사자는 없는데 경보만 밤낮으로 울린다. 실체가 없으니 꺼질 줄 모르고, 꺼지지 않으니 나를 지키는 대신 나를 태운다. 사회적 자아의 이 만성적 결핍을 지피는 것이 끝없는 자기착취를 연료로 삼는 성과주의, 모든 것에 값을 매겨 사고파는 시장, 사람마저 상품으로 진열하는 평가사회다. 자극이 사라지면 꺼졌을 불을, 이것들이 팔십억 명을 쉼 없이 진열해 계속 지핀다. 원시의 부족에는 이 나쁜 통증이 없었다. 나를 팔십억 명과 견주라 요구하는 세계가 없었으니까.

이게 왜 위로가 되는지 말해두고 싶다. 나를 갉아먹는 것이 결핍 자체라면, 그러니까 무언가를 바라고 아쉬워하는 그 마음 자체가 문제라면, 손쓸 길이 없다. 그건 사람의 본성이니까. 그런데 나를 병들게 하는 것이 결핍이 아니라 그것을 만성병으로 만드는 인조적 원인, 곧 끝나지 않는 저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밖에서 씌운 것은 벗을 수 있다. 타고난 결핍의 능력은 못 없애도, 그것을 쉼 없이 헛돌게 만드는 저울은 내려놓을 수 있다. 어떤 부족함은 실제 필요를 알려주지만, 어떤 부족함은 비교의 기준이 끝없이 바뀌면서 생긴다. 둘을 구분하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판단할 수 있다.

불안이나 수치심 같은 감정 자체가 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수십만 년 나를 살려온 고마운 신호다. 평가의 저울 위에서 받으면 그것은 결핍의 연료가 되지만, 알아차림 속에서 받으면 착한 통증처럼 진짜 나를 알려주는 신호가 된다. 같은 감정이 저울 위에서는 독이고, 저울 밖에서는 나침반이다.

주(註)

[1] 쾌락과 통증이 뇌에서 서로 균형을 이룬다는 '쾌락-고통 저울'은 정신과 의사 애나 렘키의 『도파민네이션』(2021)이 대중적으로 정식화했다. 그 이론적 뿌리는 리처드 솔로몬과 존 코빗의 '대립 과정 이론'(1974)으로, 어떤 정서 상태든 중추신경계가 자동으로 반대 과정을 발동시켜 상쇄하며 이 반대 과정이 반복될수록 강해진다는 것이다(내성과 금단의 설명). ↩

[2] 급성 염증의 종료는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레졸빈·라이폭신 같은 해소 물질이 능동적으로 불을 끄는 과정이라는 것이 찰스 서핸 등의 염증 해소 연구로 밝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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