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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침: 왜 충만은 흘러나오는가

좋은 경험을 충분히 음미하고 나면, 그 경험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진다. 좋은 노래를 들려주고 싶고, 마음에 남은 말을 전하고 싶다. 나는 이 변화를 넘침이라고 부른다. 왜 개인의 충만함은 다른 사람을 향하게 될까.

음미는 개인의 만족에서 끝나지 않는다. 좋은 경험으로 마음이 넉넉해지면 다른 사람을 돌보고, 자신에게 좋았던 것을 전하고 싶어진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경험이 관계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충만함이 밖으로 향하는 이유와 그 나눔이 자신에게도 어떤 변화를 만드는지 살펴보자.

결핍은 움켜쥐고, 충만은 내어준다

먼저 결핍부터 보자. 모자란 사람은 움켜쥔다. 부족하니 더 채우려 하고, 뺏길까 봐 지킨다. 결핍의 마음은 늘 안으로 오그라든다. 이건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다. 위협을 느끼는 몸의 기본 반응이다. 쫓기는 사람은 곁을 돌볼 겨를이 없다. 제 몸 하나 지키는 데 온 힘이 쏠리니까.

충만은 정반대로 움직인다. 안이 넉넉한 사람은 곁을 돌본다. 좋은 것을 보면 알려 주고 싶고, 마음이 벅차면 곁에 전하고 싶다. 이것도 마음먹어서가 아니다. 안전하다고 느끼는 몸이 저절로 밖으로 팔을 뻗는 것이다. 실제로 마음이 안정된 사람일수록 남의 어려움에 더 민감하고, 더 선뜻 돕고, 더 쉽게 연민을 낸다. 반대로 안이 불안한 사람은 남을 돌볼 여력이 없다. 돌봄의 스위치는 내가 안전할 때에야 켜지기 때문이다.1

그러니 박정해서 못 나누는 게 아니라, 애초에 안에 든 게 없어서 못 나누는 것이다. 빈 잔은 아무리 기울여도 따라지지 않는다. 넉넉한 사람은 애쓰지 않아도 넘친다.

곁으로 새어 나가는 것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곁의 사람에게 자기 안의 것을 나눠 주며 산다. 음미한 것이든, 결핍이든.

주위에 이런 사람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대단한 걸 가진 것도 아닌데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넉넉해지는 사람. 좋은 걸 보면 나에게도 알려 주고, 작은 것에도 감탄하고, 그 감탄을 곁으로 옮기는 사람. 그와 있으면 세상이 조금 더 풍성해 보인다. 그 사람이 특별히 많이 가져서가 아니다. 그가 음미하는 사람이라서다. 안에 익어 쌓인 것이 자꾸 밖으로 새어 나와 곁을 데운다.

반대의 사람도 있다. 늘 부족하다 여기는 사람 곁에서는 나까지 오그라든다. 그가 안으로 오그라들수록, 그 냉기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와 곁을 얼리기 때문이다. 무엇을 봐도 흠부터 찾고, 누구를 만나도 재고 견주는 그 마음이 옆 사람에게 옮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기 안의 온도를 옮긴다. 그러니 넘친다는 건 대단한 베풂이 아니다. 그저 안에 든 것이 새어 나가는 일이다. 다만 넉넉한 사람은 안의 것을 곁에 내어주고, 결핍한 사람은 안으로 옹크리면서도 그 냉기를 무심결에 흘린다.

저것 좀 봐

좋은 것을 보면 왜 옆 사람의 소매를 당기게 되는가. 노을이 곱다고, 이 노래 좀 들어 보라고, 우리는 왜 못 견디게 알리고 싶은가.

겪은 것을 내 말로 옮기면 그 경험을 더 또렷하게 이해하고 기억하게 된다. 그런데 말에는 성질이 하나 더 있다. 말은 혼자 쓰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 말은 태어날 때부터 듣는 사람을 향해 있다. 그러니 음미가 무르익어 언어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건네질 채비를 마친 셈이다. 빛이 달다는 문장을 얻은 날, 나는 그 말을 누군가에게 하고 싶어 혼났다. 문장은 수신인을 부른다.

저것 좀 봐, 는 그래서 넘침의 가장 작은 단위다. 대단한 베풂이 아니다. 음미한 것이 말이 되었고 말이 된 것이 저절로 곁을 향했을 뿐이다. 깊이 음미하는 사람일수록 말을 자꾸 건네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안에서 익은 것이 말의 꼴을 얻으면, 그 말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자아는 넓어지려 한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넘침은 단지 남을 데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넘치는 그 순간, 나 자신이 넓어진다.

사람에게는 자기를 넓히려는 오래된 동력이 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낯선 곳에 가 보고, 다른 사람을 알아 가며 우리는 자아를 키운다. 그리고 그 넓힘의 가장 큰 통로가 바로 사람이다.

이걸 평생 파고든 부부 심리학자가 있다.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의 아서 애런과 일레인 애런 교수다. 이들은 사람이 관계를 맺는 근본 이유 하나가 자기를 넓히기 위해서라고 봤다. 누군가를 깊이 알게 되면 그의 눈이 내 눈에 더해지고, 그가 아는 세계가 내 세계에 포개진다는 것이다. 이걸 타인을 자아 안에 들이는 일이라 불렀고, 겹치는 두 원의 그림으로 재기까지 했다. 나와 상대를 두 개의 원으로 놓고 얼마나 겹치는지를 고르게 했더니, 두 원이 많이 겹친다고 답한 사람일수록 관계가 더 오래갔다. 이 두 원이 재는 것은 연인만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 오랜 친구 사이의 가까움을 잴 때에도 두루 쓰인다.

말뿐인 이야기가 아니다. 애런 부부는 한 학기 내내 학생들에게 지금 나는 누구인가를 되풀이해 적게 했다. 그사이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가진 학생들은 자기를 설명하는 말이 눈에 띄게 늘고 넓어져 있었다. 전에 없던 관심사, 새로 생긴 능력, 낯선 자기가 그 안에 들어와 있었다. 소통하는 동안 그들의 자아가 문자 그대로 커진 것이다. 깊이 알게 된 모든 가까운 사람의 눈이 내 눈에 더해진다. 관계는 나를 남에게 내주는 일 같지만, 실은 남을 통해 내가 커지는 일이다.2

자아 확장은 소유를 늘리는 일과 다르다. 내 안에서 익은 것이 남에게 건너가고 그 사람 안에서 다시 익을 때, 나는 내 몸의 크기를 넘어 존재하게 된다고. 넘침이 바로 그 자리다. 익어 넘친 것이 남에게 건너가는 순간, 그 사람도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내어줌과 들임은 한 동작의 양면이어서, 나는 나 혼자로는 닿을 수 없던 크기가 된다. 그러니 넘침은 나를 덜어 내는 손해가 아니다. 나를 넓히는 걸음이다.

음미한 경험은 내가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더 분명하게 해 준다. 그 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누면 혼자서는 알지 못했던 관점도 받아들이게 된다. 음미는 안으로는 깊어지고, 관계를 타고 밖으로는 넓어진다. 깊이와 넓이, 그 둘이 실은 한 동작이다.

넉넉한 마음이 밖으로 향하는 건 억지 이타심도 의무도 아니다. 좋은 경험을 나누고 싶어지고, 나누는 동안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각도 알게 된다. 음미한 것을 나누는 일은 자신의 삶도 넓히는 일이다. 그래서 음미는 혼자만의 만족을 넘어, 다른 사람과 함께 삶을 풍부하게 하는 경험이 된다.

주(註)

[1] 마음이 안정된 사람일수록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고 이타적·연민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애착 연구가 거듭 보여 준 결과다. 마리오 미쿨린서와 필립 셰이버는 안정 애착이 돌봄 체계의 작동을 촉진하는 반면, 불안정 애착(위협·자기보호 상태)은 그것을 억제한다고 정리했다(Mikulincer & Shaver, 2005). 결핍이 사람을 안으로 말아 넣고 충만이 밖으로 팔을 뻗게 한다는 이 대비는 그 관찰에 기댄다. ↩

[2] 가까운 관계가 타인의 관점·자원·정체성을 자아에 포함시켜 자아 개념 자체를 넓힌다는 것은 아서 애런과 일레인 애런(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의 자기확장 모델(self-expansion model)이다. Arthur Aron & Elaine N. Aron, Love and the Expansion of Self(1986). 사랑에 빠진 학생의 자기개념이 한 학기에 걸쳐 다양해지고 넓어진다는 종단 연구는 Aron, Paris & Aron(1995),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그 확장을 겹치는 두 원('타인의 자아 내 포함', Inclusion of Other in the Self)으로 측정하고 겹침이 관계 지속을 예측한다는 것은 Aron, Aron & Smollan(1992), 같은 학술지 63권 4호. 이 척도는 연인만이 아니라 가족·친구 등 온갖 가까운 관계의 친밀함을 재는 표준 도구로 널리 쓰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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