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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그리고 숙성

반응하는 객체에서 음미하는 주체로

좋은 풍경을 보고도 사진 한 장을 찍은 뒤 곧바로 다음 일을 할 때가 있다. 맛있는 차를 마시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다 보면, 무엇을 마셨는지조차 흐릿해진다.

같은 경험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에 남는 것이 달라진다. 잠깐 멈춰 즉각적인 반응을 유예하고, 들어온 감각을 자신의 생각과 감정으로 음미해 본다. 이게 뭐지, 무슨 느낌이지, 무엇을 닮았지. 그 시간을 거치면 바깥에서 온 경험은 내가 이해하고 느낀 것으로 달라진다.

음미에는 두 움직임이 있다. 바로 반응하지 않고 잠깐 멈추는 유예, 그리고 그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는 숙성이다.

유예: 즉각 반응하지 않고 멈춘다

첫 박자는 유예다. 들어온 것을 곧장 반응하지 않고 붙들어 두는 일.

우리는 대개 반응한다. 좋은 것이 오면 얼른 반응하고 다음을 찾는다. 맛있는 걸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 좋은 풍경을 사진 한 장으로 해치우고, 누가 거슬리는 한마디 하면 바로 성질을 내버린다. 반응은 빠르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즉각 반응한 것은 익을 새가 없기 때문이다.

유예는 그 즉각적 반응을 잠깐 멈추는 일이다. 좋은 것이 왔을 때, 바로 넘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문다. 이 멈춤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사실은 대단한 능동이다. 세상은 온통 우리를 다음으로 떠미는데, 그 흐름을 거슬러 지금에 발을 딛는 일이니까. 알림을 확인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보는 동안 관심은 계속 다음 대상으로 옮겨간다. 유예는 그 움직임 속에서 한곳에 머무는 힘이다.

여기서 중요한 걸 짚어야 한다. 유예의 반대는 곧장 반응해 써 버리는 소비다. 움켜쥠이 아니다. 유예와 움켜쥠은 겉으로 비슷해 보여도 방향이 다르다. 움켜쥠은 순간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 손아귀에 가두는 것이고, 유예는 그저 곧장 반응하기를 미루고 곁에 머무는 것이다. 움켜쥐면 순간은 손안에서 죽는다. 노을을 움켜쥐려 사진 백 장을 찍으면 정작 실재의 노을을 자신의 두 눈으로 경험하지 못한다. 유예는 반대로 손을 편 채 그저 함께 있는 일이다. 흘러가게 두면서, 다만 서둘러 보내지 않는 것. 움켜쥠은 오히려 뒤에 올 숙성을 가로막는다.

숙성: 음미해서 내 것으로 짓는다

붙든 것을 이제 숙성시킨다. 음미의 두 번째 박자다.

숙성이란 무엇인가. 들어온 날것을 내 생각과 감각과 정서로 굴려, 나를 통과한 무언가로 다시 짓는 일이다. 이게 뭐지, 무엇을 닮았지, 하고 묻는 그 굴림이 숙성이다. 술이 익고 장이 익듯, 시간과 관심을 들여 날것을 무르익게 하는 것.

우리 뇌는 세상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도록 진화되었다. 숙성은 바로 그 구성력을 필요로 한다. 감각은 날것의 재료일 뿐이고 그것이 내 틀을 통과할 때 비로소 내 세계의 한 조각이 된다. 노을은 내 눈에 들어온 빛일 뿐이지만, 내가 그것을 며칠 굴려 음미하면 그것은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지어진다. 밖에서 온 것이 안에서 내 것이 되는 이 변환, 그것이 숙성이다.

그래서 숙성한 것은 원본과 다르다. 이 점이 결정적이다. 내가 음미해 남긴 것은 노을 그 자체가 아니다. 노을이 내 안에서 된 무엇이다. 원본은 흘러갔고, 남은 것은 나를 통과하며 새로 빚어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노을을 소유한 게 아니다. 노을은 이미 보냈다. 다만 그것이 내 안에 남긴 결을 지녔을 뿐이다. 무언가를 음미한다는 건 그것을 움켜쥐어 두는 게 아니라, 그것이 나의 고유한 시간으로 남겨지는 걸 허락하는 일이다.

하나의 모체, 여러 얼굴

유예와 숙성, 이 두 박자를 한데 묶으면 하나의 동작이 된다. 받아서, 유예하고, 음미해, 다시 짓는 것. 나는 이것이 나를 짓는 원천이며 모체라 본다. 음미하는 마음의 근본 동작.

우리가 아는 여러 좋은 상태가 사실은 전부 이 하나의 모체에서 파생된다. 음미, 묵상, 감사, 감동, 경외, 깨달음, 몰입.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뿌리는 하나다. 무언가를 받아서, 곧장 반응하지 않고, 음미해서, 내 것으로 다시 짓는 것. 혀로 음미한 것은 그대로 음미로 남고, 머리로 음미한 것은 묵상이나 깨달음이 되고, 가슴으로 음미한 것은 감동이나 감사가 된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좋은 상태들이 우리에게 어쩌다 찾아오는 우연이 아니라, 음미라는 하나의 동작이 켜졌을 때 피어나는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경외와 감사와 감동과 감탄은 따로 노는 감정이 아니다. 펜실베이니아대의 데이비드 예이든과 토론토대의 제니퍼 스텔라를 비롯한 정서과학자들은 이들을 '자기초월 정서'라는 한 가족으로 묶는다. 이름은 달라도 하나같이 나에게 골몰하던 시선을 나 바깥의 더 큰 것으로 돌려놓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경외가 그 힘이 유난히 세다. 거대한 자연이나 압도적인 음악 앞에서 '나'라는 감각이 잠시 옅어지는데, 경외를 평생 연구한 버클리의 대커 켈트너는 이때 자기를 떠받치는 뇌 영역의 활동이 실제로 잦아든다고 설명한다. 큰 것 앞에서 작아진 나 사이로, 세상이 더 많이 들어오는 것이다.1

몰입도 같은 자리에 있다. 무언가에 온전히 빠져들면 그 순간 나를 잊는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자아를 잊는 몰입이 쌓이면 도리어 더 단단한 자아가 자란다. 순간의 자기 상실이 긴 눈으로는 자기 형성이 되는 셈이다.

이런 좋은 정서는 기분 좋게 스쳐 지나가고 마는 게 아니다. 그 순간 마음의 폭을 넓혀, 당장의 즐거움을 넘어 두고두고 쓸 자원으로 내 안에 쌓인다. 좋은 경험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거기에 주의를 두어 키우는 과정은 심리학에서도 음미라는 이름으로 연구되어 왔다. 심리학자 프레드 브라이언트와 조지프 베로프는 이를 savoring이라 불렀다. 특히 이들은 savoring을 혀의 맛에 가두지 않았다. 감각을 머금는 것뿐 아니라, 좋은 생각을 곱씹는 것, 벅찬 마음을 오래 두는 것, 지난 순간을 다시 떠올리는 것까지 포함했다. 음미는 이렇게 감각과 생각과 감정에 두루 적용된다.2 멀리는 브랜다이스대의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이런 순간을, 자아가 온전해지는 절정의 경험이라 불렀다.3

연구자들은 이 얼굴들에 저마다 이름을 붙이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살폈다. 그 이름들을 하나로 이어 보면, 흩어져 있던 것들이 실은 한 뿌리에서 난 가지였음이 드러난다. 받아서, 곧장 반응하지 않고, 음미해, 내 것으로 다시 짓는 그 하나의 모체다.

그래서 이 경험들은 판별의 증거가 된다. 지금 내 마음에 음미나 감동이나 경외 중 하나라도 떠 있다면, 그건 지금 음미가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다. 그리고 음미가 일어나고 있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음미는 나를 지금에 붙들어 두기 때문이다. 소비하는 사람은 늘 다음에 가 있지만, 음미하는 사람은 언제나 여기 있다.

쓸모를 내려놓아야 익는다

음미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쓸모의 계산을 잠깐 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순간이 나에게 무슨 득이 되는지를 묻는 한, 나는 그 순간에 머물 수 없다. 득이 없다 싶으면 곧장 다음으로 넘어갈 테니까. 칸트가 말한 사심 없는 아름다움의 즐거움은 소유나 이익의 계산 없이 대상 자체를 좋아하는 경험이다. 장자의 쓸모없는 나무는 재목으로 쓸 수 없다는 이유로 베이지 않고 살아남는다. 제니 오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에서 생산성의 요구로부터 자신의 주의를 되찾는 일을 말한다. 이 생각들은 당장의 쓸모를 계산하지 않는 경험도 삶에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4 음미도 그처럼 경험 자체에 주의를 기울일 때 일어난다.

이것이 왜 어려운가 하면, 우리는 쓸모로 모든 것을 계측하도록, 무엇을 앞에 두든 이득부터 계산기를 두드리도록 오래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저울이 그 훈련이었다. 그래서 아무 쓸모 없이 그저 머무는 일이 낭비처럼 느껴진다. 볕을 삼십 분 바라보는 게 시간 아까운 짓 같다. 그런데 바로 그 쓸모없는 삼십 분이, 소비한 하루보다 더 오래 삶에 남는다. 쓸모를 내려놓는 그 순간에만 음미가 켜지니까. 쓸모없음이 쓸모 있고, 쓸모 있음이 실은 쓸모없다는 그 역설이 여기서 다시 참이 된다.

음미하는 순간들

음미가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 네 장면으로 그려 보겠다.

첫째, 차 한 잔. 으슬으슬 추운 날 따뜻한 차를 마신다. 소비하는 사람은 목을 데우려 얼른 넘긴다. 음미하는 사람은 다르다.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온기를 먼저 느낀다. 김이 오르는 걸 본다. 한 모금을 머금고 혀에 굴리며 단맛 뒤의 쓴맛, 그 뒤의 여운까지 따라간다. 이게 무슨 향이지, 무엇을 닮았지. 같은 차 한 잔인데, 소비한 사람에게는 삼십 초의 온기로 끝나고, 음미한 사람에게는 오래 남는 한 장면이 된다. 차는 같았고, 머문 마음이 달랐을 뿐이다.

둘째, 음악 한 곡. 좋아하는 곡을 튼다. 소비하는 사람은 딴짓을 하며 배경으로 흘려보낸다. 음미하는 사람은 눈을 감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듣는다. 이 소절이 왜 이렇게 가슴을 치지, 여기서 왜 눈물이 나지. 선율을 따라가며 그 안에서 내 어떤 기억이 건드려지는지를 본다. 곡이 끝나도 그 여운이 하루를 물들인다. 배경으로 흘린 사람에게 그 곡은 없던 일이지만, 음미한 사람에게는 그날의 한 사건이 된다.

셋째, 통찰의 한마디.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이 마음에 걸린다. 소비하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간다. 음미하는 사람은 그 말을 주머니에 넣어 온다. 걷다가, 씻다가, 문득 그 말을 다시 꺼내 굴린다.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나에게 왜 걸렸을까. 그렇게 며칠을 굴리다 보면 그 한마디가 내 것이 된다. 남의 말이 내 깨달음으로 익는 것이다. 같은 말을 들었어도, 소비한 사람은 잊고 음미한 사람은 그만큼 자란다.

넷째, 벽에 든 볕. 쌀쌀한 날 벽에 쨍한 햇살이 내려앉는다. 소비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볕이다. 음미하는 사람은 그 앞에 잠깐 선다. 눈으로만 보지 않고, 그 빛을 혀로 맛보듯 느낀다. 나는 이때 빛이 달다고 느낀다. 단맛이라는 말 말고는 그 느낌을 설명할 길이 없다. 볕은 나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 먹을 수도 팔 수도 없다. 그런데 거기 가만히 머물면 그 쓸모없는 빛이 단맛이 된다. 이 사심 없는 한순간이, 저울 위에 오르지 않는 순수한 행복이다.

네 장면의 공통점이 보일 것이다. 대상은 특별할 게 없다. 차 한 잔, 흔한 노래, 지나가는 말, 벽에 든 볕. 특별한 건 대상이 아니라 머문 마음이다. 음미는 대단한 경험을 찾아 나서는 일이 아니다. 이미 곁에 있는 흔한 것에 곧장 반응하지 않고 머무는 일이다. 내 행복은 새로 구하는 게 아니라 다시 여는 일에 가깝다. 멀리 갈 것도, 돈을 치를 것도 없다. 오후의 볕, 따뜻한 차, 오래된 노래. 이미 가진 것에 잠깐 머물기만 하면 된다.

음미하는 근육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좋은 말인데, 나는 그렇게 못 한다고. 마음이 늘 바빠 도무지 머물러지지 않는다고. 당연하다. 음미는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길러지는 근육이기 때문이다.

오래 소비하며 살아온 사람은 머무는 근육이 약해져 있다. 잠깐만 멈춰도 손이 근질거리고, 조금만 지루해도 다음을 찾는다. 그러니 처음에는 잘 안 되는 게 정상이다. 오래 안 쓴 근육이 뻐근하듯, 음미도 처음엔 어색하고 답답하다. 그런데 근육이 그렇듯, 쓰면 붙는다.

그래서 나는 크게 시작하지 말라고 권한다. 하루 종일 깨어 있으려 하면 실패한다. 대신 하루에 한 번, 딱 한 순간만 정한다. 아침 첫 차 한 모금이든, 퇴근길에 마주친 하늘이든, 아이의 웃는 얼굴이든. 그 하나만은 곧장 반응하지 않고 잠깐 머물기로. 삼십 초면 된다. 그 삼십 초가 쌓이면 머무는 근육이 조금씩 붙는다. 그러다 어느 날, 정하지 않아도 저절로 발이 멈추는 순간이 온다. 근육이 붙었다는 신호다.

중요한 건 완벽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 못 머물렀다고 자책하면, 그 자책이 또 하나의 저울이 된다. 음미는 성취해야 할 과제가 아니다. 놓쳤으면 내일 다시 하면 된다. 이 느슨함이 오히려 음미를 오래가게 한다.

음미는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하나. 음미는 자극이 아니라 지속에 있다.

우리는 흔히 강렬한 것을 좇는다. 더 센 자극, 더 큰 스릴, 더 화려한 경험. 그런데 음미는 그 반대다. 강한 자극을 좇지 않고, 뾰족한 한 번의 자극보다 뭉근하게 오래 도는 여운을 고른다. 그래서 음미의 대상은 대개 들뜸이 아니라 가라앉음이고, 흥분이 아니라 회복이다.

음미가 자극이 아니라 여운에 머무는 이유는, 자극은 붙들 수 없지만 여운은 오래 곁에 머물러 다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극은 순식간에 지나가 손에 남지 않는다. 그런데 뭉근한 여운은 천천히 익어 두고두고 남는다. 그래서 강도를 좇는 사람은 늘 새 자극을 찾아 헤매지만, 지속을 음미하는 사람은 흔한 것 하나로도 오래 넉넉하다.

주(註)

[1] 경외·감사·감동·감탄을 하나의 '자기초월 정서(self-transcendent emotions)' 가족으로 보는 관점은 데이비드 예이든 외(2017)와 제니퍼 스텔라 외(2017)가 정리했다. 이들은 주의를 자기 바깥으로 돌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중 경외가 '작은 자아(small self)'를 일으키고 자기와 관련된 뇌 영역(디폴트모드망)의 활동을 낮춘다는 논의는 대커 켈트너의 경외 연구가 대표적이다(Awe, 2023). ↩

[2] '음미(savoring)'를 좋은 경험에 주의를 두어 그 강도와 지속을 키우는 반성적 과정으로 모형화한 것은 프레드 브라이언트와 조지프 베로프다(Bryant & Veroff, Savoring: A New Model of Positive Experience, 2007). 이들은 savoring을 단순한 즐김과 또렷이 구별해, 즐거움에서 한 발 물러나 그것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두는 '메타 자각'으로 정의하며, 감각·나눔·회상 등 여러 전략과 기대·현재·회상의 세 시간 모드에 걸친다고 보았다. ↩

[3] 절정경험(peak experience)을 자아실현이 이뤄지는 순간이라 부른 것은 에이브러햄 매슬로다(Maslow, 1962·1964). ↩

[4]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1790), 사심 없는 미적 즐거움에 관한 논의. 『장자』의 쓸모없는 나무 이야기. 제니 오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생산성의 요구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의를 회복하는 일에 관한 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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