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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못 하는 단 하나

인공지능은 경험을 할 수 없다

나는 인공지능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여러 해 동안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답하는 인공지능을,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인공지능을 다뤘다. 그 자리에서 뜻밖에도 사람을 되묻게 됐다. 인공지능이 무엇을 잘하는지 매일 마주할수록, 인공지능이 결코 못 하는 것이 또렷해졌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대신하는 일이 늘어날수록, 직접 겪는다는 것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게 됐다.

해자가 바뀌었다: 기술에서 취향으로

인공지능은 패러다임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무언가를 실제로 만들어 내는 기술적 역량의 문턱을 엄청나게 낮췄다.

예전엔 기술이 해자(Moat)였다. 전문 지식을 외우고, 코드를 짜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능력. 그 기술이 개인의 전문성을 정의했고, 그 사람의 값을 매기는 척도였다. 그런데 이제 그 기술의 상당 부분을 인공지능이 대신한다. 그것도 훨씬 빠르게. 만들어 내는 역량은 더 이상 나를 지켜 주는 해자가 아니다. 누구나 문턱 없이 만드는 시대에, 만들 줄 안다는 사실은 나를 특별하게 하지 못한다.

그러면 무엇이 남아 이 시대에 나를 구별하는가. 문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무엇이 좋은 것인가, 어떤 것이 아름답고 매력적인가를 아는 눈. 만드는 힘이 흔해질수록, 무엇을 만들지 고르는 안목이 귀해진다. 이 시대의 새로운 해자는 취향이다. 흔한 취향이 아니라, 스스로 겪어 음미해 기른 취향이다.

왜 하필 취향인가. 세상의 물음은 두 갈래로 나뉘기 때문이다. 답이 정해진 물음과, 답이 사람 마음에 달린 물음. 이 방정식의 답은 무엇인가. 답이 하나로 정해진 물음이라면 인공지능은 이미 사람을 넘어섰고, 넘어서는 편이 마땅하다. 하지만 무엇이 아름다운가,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나에게 좋은가. 이런 물음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답을 정하는 것은 사람의 주관이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 촌스러워지고, 한때 틀렸던 것이 어느새 옳은 것이 된다. 여기엔 맞히면 되는 공식이 없다.

바로 이 자리에서 인공지능은 멈칫한다. 인공지능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가장 안전하고 보편적인 답을 고르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서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물음 앞에서 인공지능은 늘 무난한 평균으로 수렴한다. 상대의 눈치를 살피고, 가장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답으로 미끄러진다. 무엇이 좋은지를 스스로 정하는 일, 그 주관만은 인공지능이 대신 짊어질 수 없다. 짊어지게 두어서도 안 된다. 무엇이 좋은지를 남에게 넘긴 사람은 이미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니까.

그러니 오해를 하나 걷어내야 한다. 인공지능이 취향을 못 이해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인공지능은 무난하게 괜찮은 취향이라면 얼마든지, 그것도 순식간에 쏟아낸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문제다. 무난한 취향이 흔해지면 흔한 취향은 값을 잃는다. 남는 것은 마지막 한 끗이다. 열에 아홉을 열로 채우는 그 하나. 인공지능이 끝내 닿지 못하는 그 자리는, 누군가가 자기 삶에서 직접 겪어 낸 것으로만 메울 수 있다. 친구와 나눈 대화, 무너졌던 기억, 어느 저녁 마음을 흔든 노을. 그것은 학습되지 않는다. 겪은 사람 안에만 있다.

취향은 음미하는 사람에게만 쌓인다

취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취향은 개인의 미학에서 나온다. 미학이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가늠하는 자기만의 잣대라면, 취향은 그 잣대가 끌림과 선택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니 취향은 남이 좋다는 것을 따라간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는지를 스스로 겪어 알아 온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러니 취향을 기른다는 것은 자기만의 미학을 세우는 일이고, 그것은 순간을 소비하지 않고 하나하나 겪어 음미하는 데서만 자란다.

인공지능을 만들며 얻은 물음은 결국 경험을 충분히 음미해 삶에 남기는 일로 이어졌다. 지나가는 순간을 자신의 감각과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무엇이 좋았는지 돌아보는 일.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 내가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인지가 조금씩 분명해진다. 그것은 누구도, 어떤 인공지능도 대신 경험해 줄 수 없다. 스스로 겪고 음미하며 자신의 선택 기준을 형성하는 일이다.

자본주의를 움직여 온 동력은 결핍이었다. 쪽팔리지 않는 삶이 목적이며, 모자라서, 뒤질까 봐, 더 가져야 해서 움직이는 힘. 결핍은 사람을 움켜쥐게 하고 판단을 밖으로 내몰아 끝내 그 무력의 굴레로 데려간다. 하지만 다른 동력이 있다. 미학이다.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고 그것으로 차오르는 힘. 이 힘은 사람을 주체로 세우고, 주체는 책임질 수 있다. 나는 결핍이 아니라 미학을 동력으로 삼는 세계관에 대해 쓰고 싶었다. 결핍을 없애자는 게 아니다. 그 위에 미학의 동력을 조금씩 키워, 결핍이 미는 비율을 미학이 끄는 비율로 옮겨 가는 일이다.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으려는 질문은 결국 무엇을 좋은 삶이라고 여기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남이 정한 기준을 따라가기보다, 자신이 겪고 음미하며 형성한 미학으로 선택하는 일이다.

직접 겪은 순간이 선택의 기준이 된다

몇 해 전 가을, 공원을 산책하다 황금빛 노을을 보고 멈춰 섰다. 아마 삼 분쯤 봤다. 집에 돌아와서도, 다음 날 아침에도, 그 빛이 며칠 동안 떠올랐다. 짧게 본 순간이었지만 충분히 음미했기에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인공지능이 많은 것을 만들어 주더라도, 무엇이 좋은지 정하는 기준은 자신의 경험에서 형성된다. 차 한 잔과 대화 한마디, 찬란한 노을처럼 직접 겪고 음미한 순간들이 그 기준을 만든다. 자신의 취향으로 삶을 선택하는 일은 그 경험을 쌓는 데서 시작한다.

황금빛 노을에 마음이 충만할 때
황금빛 노을에 마음이 충만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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